이렇게 좋은 기회를 놓치다니…
By James H. Choi
http://Korean.SabioAcademy.com
원문출처
한국에서 미국 대학을 목표로 준비하는 학생들을 보면 참 대단하다.
이민온 한국인이 20년을 살아도 고전하는 영어를 한국 학생들은 미국 땅에 발을 밟지도 않고서도 터득한다. 미국 역사는 물론 심지어는 영어 작문에서도 미국의 학생들보다 고득점을 하고 미국인을 제끼고 미국의 대학에 합격한다. 이는 황소와 씨름에서 이기는 것이고 치타와 달리기에서 이기는 것이다. 참 대단하다.
내가 보기에는 한국에서 공부한 학생이 미국 대학에 합격하는 것이 이곳의 2세가 합격하는 것 보다 10배가 더 힘들다. 노력이 10배 필요한 것이 아니라 같은 조건을 가진 100명이 지원하면 2세는 10명이 합격하고 한국에서 온 학생은 1명이 합격한다. 한국인 뿐 아니라 미국 영주권이나 시민권이 없는 외국 국적의 학생은 아주 뛰어난 재능과 기록을 가지고 있어도 고배를 마시는 경우가 수두룩하다. “저 학생이 안된다면 대체 누가 합격한다는 말인가???”하고 턱이 다물어지지 않는 불합격 소식 다 외국인으로 지원한 학생이었다. 동양인 quota는 없다고 누누히 강조하지만 외국인 quota는 공식적으로 선포되니까. 내가 가르치는 학생도 영주권/시민권이 없으면 준비하는 강도가 완전히 바뀌어 버린다.
대학의 관문만 높은 것이 아니다. 많은 경시대회, 무료 여름 캠프도 미국 시민권이나 영주권이 있는 학생으로 자격을 국한시킨다. 대학의 학비 지원금도 외국에서 오는 학생에게는 국물도 없지만 영주권/시민권자는 돈이 없어 최고 대학에 못 다니는 경우가 없다. 아니 오히려 돈이 없으면 최고 대학으로 가는 것이 더 저렴하게 공부할 수 있는 꿈같은 기회가 열려 있다. 한국에서 준비하는 학생이 보면 미국 영주권/시민권을 가진 학생은 영어를 처음부터 native speaker로 구사하며 돈 걱정 없이 아무런 거침없이 승승장구할 수 있는 낙원에 살고 있다.
한데 골고루 유리한 조건을 누리는 교포 2세 학생들은 무엇을 하고 있는가? 한국에서 오는 학생들에 비하면 “조금만 노력하면” 명문대출신의 후광효과를 저렴하게 그리고 비교적 쉽게 영위할 수 있는데 정작 이런 유리한 조건을 갖춘 학생들은 그렇게 열심이 아니다. 게임에 열중이거나 “인생은 즐길 수 있어야 한다”고 정색하고 강조한다. “나는 네가 행복하기 바란다”라는 부모의 말을 정말 그대로 믿어 부모에게 “나는 지금이 행복하니 힘든일 시키지 말라”고 진지하게 말한다. 토끼가 낮잠을 자야 거북이에게 기회가 주어지는 것인가? 이렇게 해서 세상이 공평해지는 것인가?
물론 그 학생의 학부모가 이민/유학와서 성공한 것이 바로 미국인이 “행복을 추구”하며 “여유있는 삶”을 놓치지 않기위해 외국에서 온 사람과의 정면대결에서 양보한 때문인데 이제는 그 밀려나는/양보하는 미국인이 바로 우리의 자녀들이다. 미국에서 태어나서 미국인으로 자라나더니 외국인에게 양보하는 미덕까지 보이는 것이다. 요순시절에는 이민자/유학생에게 양보하고도 다른 할 일이 있었지만 각박해지는 국제경제 속에서 양보 다 하고 나면 무슨 일이 남을까? 나도 모르겠다.
물론 한곳의 생활에 잠겨 있으면 모든 어려움이 확대되어 보여 도저히 극복할 수 없는 난관으로 보이게 된다. 하지만 자신보다 훨씬 더 큰 난관을 뚝딱 극복해버리는 학생이 수두룩 하다는 것을 직접 보면 자신의 엄살이 한심해지고 문제를 피해가는 모습이 초라해질 것이다.
관건은 어떻게 “더 큰 세상을 미국이라는 우물안에서 자신이 대단히 제일 잘났다고 생각하며 자라나는 학생들에게 늦기전에 보여주는 것인가?” 이라고 생각 되는데 과연 얼마나 효과가 있을지? “의무”라는 개념은 전혀 없이 “좋아하는 것을 하면 된다”는 소리만 듣고 자라 정말 “좋아하는 것”만 골라하며 잘하면 칭송성 칭찬, 못하면 격려성 칭찬을 듣기 바라는 학생들. 담 밖의 무서운 적수를 보더라도 “나는 그런 경쟁 안좋아해”하면 그만 아닌가? 부모님이 항상 “좋은 것” 하라고 했으니. 그러면 “무조건의 사랑”을 평생 약속해 온 부모님은 조건 없이 지속해서 학생이 “좋아하는 것”을 찾을 때까지 “무조건” 사랑과 “무조건” 지원을 하고, 그것이 그려오던 삶이 단상이 아니었던가?
나는 “세상의 누구나 다 내 학생이 될 수 있다”는 지극히 개방/공평하면서도 “누구였건 내가 가르친 학생이 이겨야 한다”는 지극히 편협/이기적인 생각을 동시에 갈등없이 굳게 믿으며 살기 때문에 내게는 어느쪽이 우세하건 관계없다. 히딩크가 어느 나라 축구팀이건 자신이 코치한 팀이 이기는 것이 가장 중요한 것에 비유하면 이해가 쉽다. 나도 학생이 무슨 색이었건 어디 출신이건 내 학생이 성공하면 그것이 나의 성공이다.
한 데 양쪽을 동시에 보고, 가르치고 있는 내게는 미국쪽이 답답하다. 아무리 등잔및이 어두워도 분수가 있지 이 땅에 살면서 이 땅의 사람에게 유리하게 만든 이땅의 황금같은 기회를 가볍게 보고, 아니면 부담스럽게 보고 외국에서 오는 학생에게 저항없이 넘겨준다는 것은 비극쪽에 가깝다.
현재 미국의 대학이 외국인 학생의 비율을 낮게 책정하고 미국의 학생에게 우선권을 주니까 그나마 견디고 있지만 언젠가 미국 대학이 “신입생을 국적에 관계 없이 실력으로만 선발 한다”고 하면 몇명이나 살아 남을까? 대학원에서는 이미 실시되고 있는 제도이고 물론 이공계의 대학원은 외국인이 대다수를 차지한다. 이 글을 읽으시는 많은 독자분들이 바로 이 대학원을 장악한 유학생 출신거나 배우자이시다.
그리고 인종적으로도 “국적에 관계 없이 동양인을 전체 신입생의 20%로 잠정 결정”하여 실력으로만 뽑는다면 미국의 교포 2세는 몇 명이나 뽑힐까?
그리고 이미 일어나기 시작한 현상으로 대학이 운영난을 타개하기 위해 “외국인이어도 학비를 지불할 능력이 있는 학생 순으로 받는다”고 하면 미국의 한국인 2세들은 몇 명이나 경쟁에서 살아 남을까?
북 극의 빙산이 녹아 북극 곰이 살아갈 수 있는 자리가 줄어가고 있다고 들었다. 미국에서 부모님의 “조건 없는 사랑”을 받으며 자라나 “좋아하는 것”을 찾고 있는 학생들이 앞으로 행복하게 살 수 있는 여지도 줄어가고 있는 것이 보인다.